암흑 속에서, 리현의 말이 떠올랐다. "그 몸은 시제품이면서 맞춤형이지. 영겁에 가까운 고문을 받으며 깨달음을 얻어 작은 세계를 꿰뚠 죄인을 위한 몸이었다. 비록 몸의 주인은 다른 몸에 정착하고 사라졌지만 시제품의 개념은 계속 남아 있었다. 내 친구들은 개념으로 남아있는 그 몸을 누군가가 탈취해 가져가면 위험할거란 생각을 했어. 기본적으로 그들과 비슷한 힘...
한 시간동안 상태를 지켜보던 유인은 노우에게 이상소견이 발견되지 않음을 확인하고선 짐을 챙겼다. 심경이 복잡한지 배웅을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를 노우를 보던 유인은 어깨를 으쓱이곤 들어가보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일이 끝나면 찾아뵙겠다고 한번 연락이라도 주는게 어떨까요? 이번주는 일단 예후를 봐야 하니까 못 본다고 쳐도 다음주에는 만나뵈어도 될 것 같은데."...
가습기 위에서 올라오는 물안개가 그 너머 황금빛 마천루와 어우러지면서 자아내는 감상이란, 노우는 넋을 놓은 채 저 밖을 바라보며 제 몸을 타인에게 맡겨냈다. 주먹을 꼭 쥐었다 펴면서 자신의 팔에 주입된 약물이 퍼지는 감각을 느낀 노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고개 돌려요. 바이탈 사인이랑 유전정보 변화기에서 이상신호 잡기 어려워지니까." 자신의 바이탈 사...
"언젠 안 그랬겠냐만, 녹성원의 장로회는 자신들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커요." "에?" 그런 말을 제 앞에서 해도 되는 건지 경악을 금치 못하던 노우는 뒷전이고.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에 자신의 유전 정보로 추적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 못했나? 그들은 여유롭게, 혹은 개의치 않고 아는 정보들을 풀어냈다. 노우가 알지 못했던 신록의 정...
노우는 그 개를 가까운 곳에서 본 적이 있었다. 말을 붙여본 건 아니지만 저쪽 세계가 무너지기 전, 몇 년 동안 그 사람을 찾는다고 리현의 아이들이 사방팔방으로 노력하던 그 시절에. 그녀는 신록의 부탁으로 재건되기 전의 세계로 갔다. 전공 교수가 그 당시에 자리에 없던 리현의 아이들, 이윤이기도 했고, 신록의 부탁에 잠깐의 휴학정도는 괜찮았으니 그렇게 맡아...
"그나저나, 어떤 일로 오셨는지 여쭐 수 있을까요? 사적인 거라면……."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그냥, 그냥……. 별 거 아니니까요." 이윤은 먼저 온 손님인 노우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상록과 무연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잠시 빠져달라는 듯 눈치를 주려고 했다. 노우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그녀의 입장에서 그렇게 중요하거나 사적인 질...
정갈히 써진 글씨와 자료처럼 보이는 건축물 사진이 칠판 위에 적혀 있었다. 각양각색 외형의 학생들은 제각기 필기를 하거나 졸거나, 또는 다른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도 많은 군중들의 시선이 단 한사람에게 몰려있었는데. 그건 연단 위에 선 한 사람이었다. 회백색 머리카락을 정갈히 한데 모아 묶은 사람은 한 손에는 유인물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포인터를 ...
황금이 흐르는 하늘의 빛이 다하면 어둠이 찾아와 깊은 장막을 드리운다. 사람들은 시기에 맞춰 자신의 보금자리로 향하고, 그러지 못한 이들은 그들의 목적에 따라 각자의 목표로 향하곤 한다. 검은 후드를 깊게 뒤집어 쓴 사람은 그 자체로도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런 그림자는 자신의 목적에 따라 어느 한적한 골목길로 빠져들어갔다. 도심에서 벗어난 주택가. 그 중에...
*주지아, 이은성 캐릭터는 제 캐릭터가 아니며, 해당 캐릭터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자존심 고고하게 세우던 놈이 기껏 부탁해서 왔더니 짬처리를 해?" "지아씨, 뭐라 하셨어요?" "천사님 고생시키기 싫다고요!" 날아드는 총탄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팡이의 끝으로 튕겨낸 지아가 자신의 반려가 뻔히 들었을 소리를 능청스레 얼버무렸다. 맞은 편에...
귀족 작위를 그저 이름표 뒤에 붙는 꼬리표 정도로 생각하면 편하겠다만. 일단 한 번 붙고 나면, 그것도 세습된다면 거기서부턴 명성이 붙기 시작한다. 세습 가능한 명성이란, 한 번이라도 그들의 입맛에 맞게 위대해 보이는 순간 모든 이들의 탐욕을 불러일으킨다. 단점밖에 없었던 구식으로의 회귀는 삽시간이다. 케드릭의 의중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이건 확실히 ...
한두 달 넘기기 전에 륀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던 국가는 달은 우습게 넘기고, 신출귀몰한 그 동태 때문에 몇 년 가까이 그림자 하나 잡히지 않아 발만 동동 굴렀다. 그나마 그들이 가까이에서 봤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은 수배 10년 뒤. 새해 기념일을 맞아 인산인해였던 수도권에 얼굴 한 번 반짝 비추고 그 인파 속으로 녹아 숨어버린 게 마지막이었다. 륀...
「수많은 거절을 했음에도 오늘 이 자리에 올라온 이유는 여러분들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만나고 싶어서였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경외와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신기한 능력 하나쯤 있는, 지나가다 흔히 볼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제가 한 행위들의 확신을 얻고 싶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니 가정이 확신으로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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